그림자
의미 및 설명
성경에서 ‘그림자’는 빛이 차단될 때 나타나는 물리적인 어둠의 형상을 뜻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 단어를 단순한 자연 현상으로만 사용하지 않는다. 그림자는 문맥에 따라 짧고 덧없는 인생의 유한함을 대변하기도 하고, 실체가 도래하기 전까지 그 존재를 미루어 짐작게 하는 예표와 모형이 되기도 하며, 때로는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으신 변함없는 하나님과 대비되는 피조물의 불완전함(변화의 흔적)을 상징하기도 한다.
구약에서 ‘그림자’는 일차적으로 문자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대표적인 예로 사사기 9장 36절에서 가알이 산에서 내려오는 무리를 보고 군사들이라고 하자, 스불은 그가 산 그림자를 사람으로 잘못 본 것이라며 핀잔을 준다. 여기서 ‘그림자’에 사용된 히브리어는 צֵל(ṣēl, 첼)로, 물체에 빛이 가려져 생기는 어두운 형상을 의미한다.
열왕기하 20장 9–11절과 이사야 38장 8절에는 히스기야 왕의 생명 연장을 확증하는 신적 징표로 "해 그림자가 뒤로 물러가는 초자연적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이 대목의 ‘그림자’ 역시 히브리어 צֵל(ṣēl, 첼)이 사용되었으며, 이는 아하스의 해시계 위에 드리워졌던 실제 그림자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해 그림자를 뒤로 물러가게 하심으로써, 자기 백성에게 하신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이심을 보여 주셨다.
역대상 29장 15절은 이 땅에 머무는 인간의 날이 그림자 같다고 말하고, 욥기 8장 9절 역시 인간이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또한 욥기 14장 2절은 인간을 꽃과 같이 피어났다가 시들며, 그림자 같이 지나가는 존재로 묘사한다. 이 구절들에 사용된 그림자 역시 히브리어 צֵל(ṣēl, 첼)이고,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인간 생명의 유한함을 나타낸다.
시편도 같은 의미로 그림자를 사용한다. 시편 39편 6절은 인간을 그림자 같이 다니며 헛된 일로 소란한 존재로 묘사하고, 시편 102편 11절은 자신의 인생을 기울어지는 그림자에 비유하며 탄식한다. 또한 시편 109편 23절은 생명의 쇠잔함을 석양 그림자 같이 지나간다고 토로하며, 시편 144편 4절은 인간의 날을 지나가는 그림자 같다고 노래한다. 이처럼 시편에서 그림자는 피조물인 인간의 연약함과 인생의 유한성, 그리고 이 땅에서의 삶이 지닌 불확실성을 나타낸다.
전도서 역시 그림자를 인생의 허무함과 연결하여 고찰한다. 전도서 6장 12절은 모든 인간이 그림자 같이 지나가는 헛된 모든 날을 보낸다고 탄식하며, 전도서 8장 13절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악인의 날이 그림자와 같아서 장수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림자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결국 사라지는 인간 삶의 유한성과 헛됨을 가리킨다.
반면, 아가서 2장 17절과 4장 6절에 등장하는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라는 고백 속에 언급되는 그림자는 저녁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시적 표현이다.
신약에서도 그림자는 문자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사도행전 5장 15절은 사람들이 병든 자를 거리에 메고 나와, 베드로가 지나갈 때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이기를 바랐다고 기록한다. 여기서 ‘그림자’를 뜻하는 헬라어 σκιά(skia, 스키아)는 사람의 몸이 빛을 가려 생기는 실제 물리적인 그림자를 가리킨다.
신약에서 그림자는 실체가 오기 전의 예표를 뜻하는 신학적 표현으로도 사용된다. 골로새서 2장 17절은 구약의 음식 규례나 절기, 초하루, 안식일 등을 "장래 일의 그림자"라고 말하며, 그 몸, 즉 실체는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림자’를 뜻하는 헬라어 σκιά(skia, 스키아)는 구약의 의식과 절기들이 최종 실체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참된 구원을 미리 가리키는 예표적 수단임을 보여 준다.
히브리서 역시 동일한 맥락에서 그림자와 모형의 개념을 사용한다. 히브리서 8장 5절은 구약의 제사장들이 섬기는 성막 제도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그림자’를 뜻하는 헬라어 σκιά(skia, 스키아)는 구약의 제사 제도가 그 자체로 영원한 실체가 아니라, 하늘의 참된 실체를 미리 보여 주는 제한적인 모형임을 나타낸다.
히브리서 9장 24절은 인간이 손으로 만든 지상 성소를 “참 것의 그림자”라고 표기하지만, 이 구절의 원어는 스키아(σκιά)가 아니라 ἀντίτυπα(antitypa, 안티튀파)이다. 이 단어는 ‘참 것에 대응하는 모형’, ‘본뜬 것’, ‘대응물’을 뜻한다. 따라서 여기서의 '그림자'는 물리적·예표적 그림자라기보다, 하늘 성소에 대응하여 지어진 지상 성소의 모형적 성격을 설명하는 표현이다.
히브리서 10장 1절은 율법을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 참 형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림자’는 다시 8장 5절과 같은 σκιά(skia, 스키아)가 사용되었다. 이는 구약의 제사와 의식 제도가 그 자체로 온전한 실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속 사역을 미리 가리키는 예표적 수단이었음을 뜻한다.
야고보서 1장 17절에는 "하나님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라고 기록되어있다. 여기서 ‘그림자’는 헬라어 ἀποσκίασμα(aposkiasma, 아포스키아스마)로, 빛의 천체가 움직이거나 회전할 때 투영되는 그림자, 즉 ‘변화에 따른 어둠의 흔적’을 뜻한다. 야고보는 위치나 밝기가 끊임없이 바뀌는 피조 세계의 광명체들과 달리,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는 단 한 점의 변함이나 어두운 그늘도 없음을 이 단어로 강조한다.
따라서 성경에서 ‘그림자’는 문자적으로 빛이 가려 생기는 어두운 형상을 뜻하지만, 더 넓게는 인생의 덧없음, 시간의 흐름, 실체가 오기 전의 예표, 변화와 불완전함을 나타낸다. 구약에서는 주로 인간 생명의 짧음과 세상 삶의 불확실성을 표현하는 비유로 사용되고, 신약에서는 구약의 의식과 제도가 그리스도라는 참 실체를 미리 가리키는 모형이었음을 설명하는 데 사용된다. 따라서 성경의 그림자는 실체 그 자체가 아니라, 실체를 가리키거나 그 실체와 대비되는 임시적이고 제한적인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다.